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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커피칼럼] 한 잔의 커피는 느린 협주곡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발견한 커피의 구조와 여운
* 본 칼럼은 제4회 세계커피콩축제를 기념해 기획된 연재 시리즈입니다.


[글: 김경민] 나는 음악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의 구조나 작곡 기법을 설명할 만큼 전문적인 지식도 없다. 오랫동안 내게 음악은 좋은 멜로디와 분위기, 마음에 남는 한 장면에 가까웠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도 그렇게 만났다. 어느 영화에서 우연히 들었는데, 낮고 깊은 피아노 화음과 천천히 밀려오는 오케스트라의 울림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곡을 제대로 들어보고 싶어 음악감상실을 찾아 진공관 앰프로 몇 차례 반복해 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들을수록 이 음악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낮은 피아노 화음이 문을 열고, 오케스트라가 세계를 확장한다. 선율은 긴장과 완화를 반복하고, 마지막에는 지나온 시간 전체가 하나의 여운으로 남는다.

그때 알게 됐다. 협주곡은 긴 소리의 나열이 아니라 시작과 전개, 절정과 결말을 가진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좋은 커피도 이와 닮았다. 커피는 처음부터 정확한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잔에서 올라오는 향과 첫 모금의 온도, 입안에서 열리는 맛, 마신 뒤에도 남는 감각이 먼저 다가온다. 산미와 단맛, 질감과 여운을 구분해 말하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시작은 화려한 폭발이 아니다. 낮고 무거운 피아노 화음이 반복되며 곡의 문을 천천히 연다. 좋은 커피의 첫 향도 한 잔의 도입부다. 어떤 커피는 꽃처럼 가볍게 열리고, 어떤 커피는 초콜릿처럼 묵직하며, 어떤 커피는 잘 익은 과일처럼 밝게 다가온다.

그러나 음악이 첫 화음만으로 완성되지 않듯 커피도 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첫 모금이 입안에 들어오면 향은 맛으로 변하고, 산미와 단맛, 쓴맛과 질감이 저마다의 모습을 드러낸다.

산미는 커피에 생기를 주고, 단맛은 그 산미를 부드럽게 받쳐준다. 적절한 쓴맛은 깊이를 만들고, 질감은 모든 감각이 입안에 머무는 방식을 결정한다. 좋은 커피에서는 하나의 맛이 독주하지 않는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대화하듯, 커피의 감각들도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며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협주곡의 2악장이 강렬한 인상보다 깊은 서정으로 기억되듯, 좋은 커피도 단맛과 여운에서 자신의 깊이를 드러낸다. 커피의 단맛은 설탕처럼 단순한 감각이 아니다. 날카로운 산미를 감싸고 무거운 쓴맛을 들어 올리며 전체의 균형을 잡아주는 조용한 힘이다.

좋은 커피는 마시는 순간보다 마신 뒤에 더 분명해질 때가 있다. 마지막 모금이 지나간 뒤에도 입안에 남는 단맛, 코 뒤쪽으로 다시 올라오는 향, 혀 위에 머무는 부드러운 감각이 있다. 여운은 사라진 뒤에 오히려 선명해지는 감각이다.

3악장에 이르면 음악은 앞에서 흘러온 감정들을 하나의 결말로 모은다. 커피 역시 마지막 모금에서 완성도가 드러난다. 처음에는 향이 좋았지만 식으면서 거칠어지거나, 뒤로 갈수록 쓴맛만 남는다면 좋은 인상은 오래가기 어렵다.

좋은 커피는 식어가는 동안에도 균형을 잃지 않는다. 온도가 내려가면서 새로운 산미가 드러나고, 숨어 있던 단맛과 향이 뒤늦게 선명해지기도 한다. 첫인상보다 마지막이 깨끗하고, 잔을 비운 뒤 다시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커피가 잘 구성된 커피다.

피아노 협주곡은 피아노 혼자만의 음악이 아니다. 피아노가 중심에 서지만 오케스트라가 받쳐주고, 밀어주고, 긴장시키며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생두가 중심이지만 생두만으로 한 잔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산지와 품종, 수확과 가공, 보관과 유통, 로스팅과 추출, 물과 온도, 잔과 공간, 그리고 마시는 사람의 감각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생두가 독주자라면 로스팅과 추출, 물과 공간은 오케스트라다. 좋은 생두라도 제대로 읽지 못하면 그 가능성은 열리지 않는다. 로스팅은 생두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추출은 그 가능성을 한 잔으로 옮긴다. 마시는 사람의 기억은 그 커피를 각자의 이야기로 완성한다.

커피의 여운은 입안에만 남지 않는다. 어떤 커피는 향으로 기억되고, 어떤 커피는 질감으로 기억된다. 때로는 그날의 조명과 음악, 창밖으로 들어오던 빛, 함께 있던 사람과 혼자 머물렀던 시간까지 커피와 함께 기억된다.

그래서 좋은 커피는 하나의 장면이 된다. 커피가 잔 안에서 서사를 만든다면 카페는 그 이야기가 머무는 무대다. 좋은 카페는 단순히 인테리어가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다.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커피를 마시고 다시 밖으로 나갈 때까지의 시간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으며 커피를 생각했다. 음악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 곡이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가는 방식이 좋은 커피와 닮았기 때문이다.

좋은 커피는 처음부터 모두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다. 먼저 마음이 반응하면 된다. 그리고 그 좋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천천히 생각하게 만들면 된다. 좋은 음악을 다시 듣고 싶어지듯, 좋은 커피도 다시 마시고 싶어진다.

음악은 소리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다. 커피도 맛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다.

한 잔의 커피는 느린 협주곡이다. 마시는 동안에는 감각으로 흐르고, 끝난 뒤에는 기억으로 남는다.

글쓴이 김경민은 시흥 세계커피콩축제 감독으로,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교수, 세계커피연구소장, 아마츄어작업실 대표 등을 맡고 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커피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 「미니멀리즘 커피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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