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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커피칼럼] 커피학은 현대판 철학이다

※ 본 칼럼은 제4회 세계커피콩축제를 기념해 기획된 연재 시리즈입니다.

[글: 김경민] "나는 커피를 마신다, 고로 존재한다"


철학은 어디로 갔는가

철학은 한때 모든 학문의 어머니였다. 오늘날 수학과 물리학, 정치학, 심리학, 윤리학으로 나뉜 질문들도 처음에는 철학의 영역 안에 있었다. 철학자는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고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며, 정의로운 사회의 조건을 고민했다.

그러나 학문이 세분화되면서 철학이 품고 있던 질문들은 각자의 전공으로 독립했다. 자연철학은 물리학과 생물학으로 발전했고, 인간 정신에 관한 탐구는 심리학과 인지과학으로 분화됐다.

이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떠올리게 한다. 리어왕이 나라를 딸들에게 나눠준 뒤 권력과 자리를 잃었듯, 철학도 자신의 지식과 질문을 여러 학문에 나눠주고 중심에서 물러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왕좌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왕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철학은 여전히 모든 학문의 밑바닥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학이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한다면, 철학은 우리가 왜 그것을 알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기술이 더 빠르고 편리한 방법을 제시한다면, 철학은 그 편리함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지를 질문한다. 철학은 하나의 전공이기 이전에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다.

오늘날 이러한 철학은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현대인의 일상 깊숙이 들어온 커피다.

한 잔에 담긴 작은 문명

한 잔의 커피에는 자연과 인간, 과학과 기술, 예술과 경제가 함께 들어 있다.

커피나무는 특정한 기후와 토양에서 자라고, 농부는 열매를 재배하고 수확한다. 가공자는 발효와 건조를 통해 씨앗의 가능성을 열고, 생두는 국가와 대륙을 넘어 이동한다. 로스터는 열을 이용해 향미를 설계하며, 바리스타는 물과 분쇄도, 온도와 시간을 조절해 한 잔을 완성한다.

그러나 커피는 기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고, 일하고, 책을 읽고, 사랑을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익숙한 커피를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산지와 품종, 가공 방식이 분명한 커피를 찾는다. 그 선택에는 입맛뿐 아니라 소비 방식과 문화적 태도, 삶의 가치가 반영돼 있다.

커피를 깊이 들여다보면 생산과 유통, 노동과 소비, 취향과 윤리, 공간과 문화가 서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한 잔의 커피는 작지만 복잡한 문명의 압축판이다.

커피학은 커피를 맛있게 만드는 기술만을 뜻하지 않는다. 재배와 가공, 로스팅과 추출뿐 아니라 커피의 역사와 카페 문화, 향미 언어와 공간 경험, 무역과 노동, 지속가능성까지 함께 바라보는 학문적 시도다.

인간은 왜 커피를 마시는가. 취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좋은 커피의 기준은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 카페에 머무는 일은 개인의 감정과 관계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서로 다른 지식을 하나의 대상 안에서 연결한다는 점에서 커피학은 과거 철학이 담당했던 역할과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커피학을 현대판 철학이라고 부른다.

감각에서 사유로

전통적인 철학이 개념과 언어에서 출발했다면, 커피학은 감각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먼저 향을 맡고 온도를 느끼며, 신맛과 단맛, 쓴맛과 질감을 경험한다. 그러나 감각은 곧 질문으로 이어진다. 같은 원두가 추출 방식에 따라 왜 다르게 느껴지는지, 나는 왜 이 맛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지 묻게 된다.

한 모금의 감각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지식이 되며, 지식은 다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유로 확장된다. 커피학이 철학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인간의 취향을 예측하는 시대에 커피와 카페의 의미는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우리의 삶은 이전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조직되고 있지만, 인간은 정보와 효율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멈추고 싶어 하고, 생각하고 싶어 하며,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한다.

사람은 생각이 필요할 때 커피를 찾는다.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카페에 가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때도 카페에 간다. 일을 하기 위해 머물기도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기 위해 앉아 있기도 한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카페인을 섭취하는 일을 넘어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자신과 세계 사이에 사유의 거리를 만드는 일이 된다.

철학의 출발점은 멈춤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을 잠시 멈추고 다시 질문하는 순간 철학이 시작된다. 커피를 내리는 몇 분, 향을 맡는 순간, 창밖을 바라보며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은 반복되는 일상에 작은 쉼표를 만든다.

커피잔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사유가 머무는 작은 공간이다.

커피가 도시와 공동체를 잇는 법

커피는 개인의 취향을 넘어 도시와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도시는 건물과 도로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주 앉던 자리, 처음 만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공간, 오래된 가게에서 맡았던 향기가 모여 도시의 표정을 만든다.

커피는 그 장면에 자주 놓여 있다. 사람들은 커피를 사이에 두고 만나고, 기다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커피 한 잔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은 여백을 만들고, 그 안에서 관계가 시작된다.

세계커피콩축제와 K-커피대학, 커피인문학교 등 지역 커피 프로젝트를 이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커피로 도시를 단번에 변화시키겠다는 거대한 선언보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곳에서 커피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이야기를 시작하게 하는 매개였고, 예술가와 시민이 만나는 작은 광장이었으며, 지역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방법이었다.

공동체는 거대한 구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함께 머문 시간과 반복된 만남이 쌓이면서 만들어진다. 커피는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잠시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게 한다. 도시의 변화는 어쩌면 그 작은 시선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마실 수 있는 철학

철학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일상 속에서 새로운 이름과 형태로 돌아오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책을 읽으며 철학하고, 누군가는 음악을 듣거나 여행을 하며 삶을 질문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카페에 앉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자신과 세계를 돌아본다.

커피학은 철학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한다. 추상적인 사유를 감각의 경험으로 옮기고, 개인의 취향을 사회와 문화의 문제로 확장한다. 한 잔의 커피에서 출발해 인간과 자연, 기술과 예술, 도시와 공동체를 함께 바라본다.

정보가 부족했던 시대에는 더 많은 지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에는 흩어진 지식을 연결하고 해석할 의미가 필요하다.

커피학은 커피를 통해 그 의미를 발견하는 학문이다. 그것은 향기로운 철학이자 마실 수 있는 사유이며, 감각을 통해 인간과 시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문장을 조금 다르게 써볼 수 있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잠시 멈추고, 감각하고, 질문하고,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글쓴이 김경민은 시흥 세계커피콩축제 감독으로,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교수, 세계커피연구소 소장, 아마츄어작업실 대표 등을 맡고 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커피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 「미니멀리즘 커피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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