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시흥타임즈는 안광일 건축사사무소 오막 소장과 함께 시흥의 역사와 도시 형성 과정,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살펴보는 기획 연재 ‘시흥, 도시읽기’를 시작한다. 연재는 총 3부, 10편으로 구성된다.
1부. 도시의 역사를 읽다. ① 수도권의 변경, 시흥 - 시흥의 행정구역 변천사, 수도권의 확장 속에 시흥의 위치 ② 소사면과 소래면 - 경인시가지계획 편입이 가른 소사면과 소래면의 운명 ③ 신천리지구, 시흥시의 첫 도시계획 - 신반월도시계획과 신천리지구 |
③ 시흥시의 첫 도시계획
- 신반월도시계획 신천리지구
[글: 안광일 건축사사무소 오막 소장·우리동네연구소 운영위원]
1976년 7월 21일 당시 서울에 무분별하게 흩어져있던 공장들을 이전시키기 위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수도권에 100만평 규모의 공업단지를 갖춘 신산업도시 후보를 두군데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한달 뒤 건설부에서 반월, 발안, 조암, 안중 지역 네곳을 후보지로 선정하여 보고하였고, 안중이 아산만 개발과 연계되어 적합하지만 서울과 너무 멀리 떨어진 관계로 반월을 선정하고 후에 반월이 어느정도 정착이 되면 안중을 착수하는 것을 지적하며 화성군 반월면, 시흥군 수암면, 군자면을 포괄하는 반월 지역을 공업단지를 갖춘 신도시 건설을 결정하게 된다.


고시안에 신반월도시계획 개발제한구역으로 경기도 시흥군의 수암면, 군자면, 소래면, 남면, 의왕면이 표기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반월 신도시 건설이 결정됨에 따라 정부는 먼저 반월신도시 주변 시흥과 화성 일대를 광역적으로 도시계획구역 및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하는 신반월 도시계획을 고시한다.
당시 정부는 신반월도시계획을 통해 반월신도시로 고시한 1750만평보다 5배 이상 큰 9500만평을 도시계획구역으로 지정하고 그 중 7500만평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었다. 이때 시흥시의 취락구역을 제외한 대부분이 개발제한구역이 지정되고 이때 지정된 개발제한구역이 오늘날 시흥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당시 고시된 결정도는 아래와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다뤄보려고 한다.

반월신도시는 1977년 기공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입지상의 장점으로 인해 꽤 성공적으로 도시가 정착될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1986년에는 서울의 공해유발시설들을 추가적으로 이주시키고 안산시의 자족기능을 확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반월공단과 연접한 군자염전을 매립하여 시화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반월신도시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와중에 신반월도시계획으로 지정된 도시계획구역에도 사업이 추진된다. 1980년대 초 신천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발표된 것이다. 지금의 신천·대야동 원도심을 구성하는 도시의 모습은 이때의 계획이 시행되어 만들어진 결과이다. 이 당시는 시화국가산업단지 조성이 발표되기 전으로 현재의 시흥시 지역에 정부 주도의 도시계획이 고시된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네 개의 그림을 차례로 살펴보면 신천리지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1977년의 개발제한구역 결정도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 이전부터 존재했던 길과 취락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후 1982년 결정도에서는 기존의 취락 위에 새로운 도시 계획이 덧씌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조감도에서는 이를 통해 만들어질 도시의 모습이 제시된다. 1985년 항공사진에서는 이러한 계획이 실제 도시공간으로 구현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신천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은 기존의 도시를 완전히 철거하고 백지 위에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었다. 기존 토지를 다시 구획해 격자형 가로망과 필지를 만들고, 토지 소유자에게 환지한 뒤 남은 체비지를 매각하여 사업비를 충당하는 방식이었다. 지적도에서 볼 수 있듯, 소래초등학교나 대야동성당, 소래면사무소, 북시흥농협 등 당시에 존재하던 기반시설들은 반듯하게 정형화된 다른 대지들과는 다르게 불규칙한 선을 어느정도 간직하고 있다. 기존의 기반시설을 어느 정도 남겨놨기 때문에 시간의 켜가 도시에 쌓일 수 있었고 남겨진 것들을 중심으로 예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조성된 격자의 도로 속에 불규칙한 길과 건물로 상징되는 옛 조직이 도시 안에 함께 남아있는 것은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풍성한 이야기를 더해주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1980년대 신천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신천리(신천·대야동)는 신천·은행·대야동을 포함하여 북시흥 지역의 중심지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후 노태우 정부의 수도권 200만호 주택공급정책에 의해 1990년대 초 은행택지개발사업이 시작되고, 2000년대에는 이명박 정부의 보금자리주택 공급정책에 의해 은행택지에 면한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되며 은계보금자리주택지구가 조성되어 현재 모습에 이르게 된다.


위의 지도비교는 신천·대야·은행동이 단순히 1980년대 정부의 도시계획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길과 물길을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과 생활권 위에 1980년대의 도시계획이 새로운 격자망을 덧씌웠고, 이후의 택지개발사업이 다시 그 외곽을 확장하며 지금의 모습에 이른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신천·대야·은행동은 오래된 생활권과 서로 다른 시대의 도시계획이 중첩되며 만들어진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최근의 선거구 획정 역시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올해 6월 지방선거에서 대야동과 신천·은행동이 서로 다른 선거구로 분리되었다. 행정이나 정치의 단위가 실제 생활권과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역의 정치는 도시의 역사와 흐름, 생활권과 발맞출 필요가 있다. 시흥이라는 도시가 만들어진 과정을 보았을 때, 이번 선거구 획정이 과연 민주적인 결정이었는지는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지금의 선거구는 마치 *게리맨더링을 연상케 한다.
* 게리맨더링(영어: gerrymandering)은 특정 후보자나 특정 정당에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획정하는 것을 말한다. 181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주지사였던 엘브리지 게리는 자기 정당에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분할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전설상의 괴물 샐러맨더(Salamander)와 비슷하여 이를 게리(Gerry)의 이름과 합하여 게리맨더(Gerry-mander)라고 불렀고, 이후 이와 같이 선거구를 획정하는 것을 게리맨더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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