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이 아닌 환경에서 풍요를 배우다.
1965년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은 작은 섬이다. 이곳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재수 대표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신 아버님과 항상 옳고 그름을 깨우쳐주신 어머님 아래서 안정적이고 건전한 성장기를 보냈다.
“작은 섬마을의 생활은 대부분 그랬을 겁니다. 감자로 끼니를 때울때도 있었고, 집 앞 바닷가에서 물놀이을 하며 해산물을 잡고, 뒷산에서 칡이나 보리수열매를 따먹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가난했다 하겠지만 그 당시는 그런 생활자체가 행복이었습니다.”
비록 섬에서 생활을 했지만 부모님은 자식들의 교육에 남다른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자식들은 섬이 아닌 좀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를 하기를 바라셨고, 그 바람대로 이재수 대표는 중학교 3학년부터 광주의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섬과는 다른 환경에서 공부한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주말마다 고향을 찾아가 부모님을 뵈었다.
“지금이야 육지에서 섬까지 다리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선착장에서 여객선을 타야지만 갈 수 있었지요. 폭풍주의보가 내려 배가 뜨지 못하면 선착장에서 배가 뜨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돌아온 적도 많습니다. 고향에 갔다 돌아올 때도 고향 선착장에서 소리 없이 우시던 어머님을 뒤로하고 올라와야했어요.”
공부보다는 부모님과의 이별이 더 큰 기억으로 남아있는 어린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진학도 빨리 기술을 익혀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전남공업고등학교 배관용접과를 선택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의 이 대표는 집안의 장남으로 부모님의 어려움을 빨리 덜어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학교 앞에 자취방을 얻었고, 학교와 집을 오가며 착실히 생활했다. 장남으로의 책임감은 그를 학교 생활에만 집중하도록 했고, 덕분에 이 대표는 2학년 때 필요한 자격증을 모두 따는 등 학교에서도 알아주는 모범생이었다. 문제는 고3, 8월에 취업을 하면서 시작됐다. 수원의 중소규모의 건설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추석이 되기도 전에 회사가 부도가 났다. 급여는 커녕 미래조차 잃어버렸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공무원시험을 준비했지만 이것도 실패했다. 두 번의 좌절 후 군대를 갔고, 군대에서의 경험이 지금의 이 대표를 만들게 된다.
현장에서 찾은 광통신 전문가의 길
군대 입대후 논산훈련소를거처 자대배치훈련을 마친 이대표는 우연하게도 배관용접기술이 아닌 사단 통신대대 무전병으로 배치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전혀 모르던 정보통신분야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들어 준 것이 군대시절이었다면, 본격적으로 정보통신분야의 현장경험을 쌓게 된 것은 군대를 전역하고 취업한 (주)광주통신공사에서였다. (주)광주통신공사는 한국통신의 협력사로 광주와 전남지역의 광통신공사를 담당했다. 이 대표는 함평과 영광으로 가는 공사현장에서 숙식을 하며 일을 배웠다.
“지금이야 광통신이 당연하지만 그 당시광통신은 너무나 생소한 분야였습니다. 광주통신공사에서조차 광통신공사를 해 본 경험이 없어 광케이블을 제조공급한 대한전선의 연구원을 초청해 광통신 공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워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광통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이재수 대표는 현장에서 직접 광통신 설비를 하면서 하나 둘 광통신에 대해 배워나갔다고 한다.
“광통신은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하나 둘씩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 기쁘고 즐거워 일이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맨홀을 들락거리고, 전봇대를 수없이 올라 다녔다고 한다. 풀리지 않는 일이 생기면 밤을 새워가며 통신선로현장을 지켰다. 전공도 아니었고, 경험도 부족했으나 좌절보다는 배움으로 맞섰다. 무엇이든 시키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고 자재관리, 시공, 설계 등 여러 분야의 경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광케이블은 물론 구리선 가설까지 통신설비의 여러 현장에서 정보통신 설비의 노하우를 축적한 이 대표는 더 많은 현장에서 일을 하기위해서는 정보통신분야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지금의 정보통신기능대학의 1년 과정에 입교해 통신선로기능사 2급과 통신기기 기능사 2급의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정보통신기능대학을 졸업하고 9년 동안 한국통신의 현장 기능직을 비롯 동종업체 통신공사에서 정보통신분야의 다양한 현장을 경험하게 된다. 이 대표는 광통신이 적용된 유선통신은 물론이고, 호출기(삐삐)와 휴대폰이 대중화되면서 무선통신을 배웠고, 다시 기업체의 구내통신과 아마추어 무선통신까지 통신과 관련된 분야는 모두 섭렵하면서 ‘이 일이 정말 내 천직이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이 대표가 창업을 결심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다양한 분야 통신설비를 해 오던 회사에서 발전 가능성이 높은 무선분야로 방향을 결정하면서 유선통신분야의 사업을 중단하기로 한 것이다. 이 대표는 무선통신 현장의 경험도 있었지만 유선통신분야에 더 큰 흥미를 느꼈고, 그 분야에서 이미 잘한다는 평가를 받아온 터라 회사의 사업 중단 결정은 충격이었다.
“나름대로 여기저기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아온 터라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른 곳으로 취직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더군요, 그래서 맨몸 하나로,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창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험이 재산이 되어준 시작
2000년 (주)골드텔 의 시작은 지금의 제조업이 아니라 광통신 관련 자재를 유통하는 유통회사였다. 창업당시는 대부분의 유통이 인맥과 자료로 거래가 되었던 시기라 통신설비현장에 필요한 자재를 정리해 카달로그를 만들고 필요한 업체에 배포했다. 그동안 공사를 통해 알게 된 현장과 기업을 찾아다니며 판로를 개척해 전국400여개의 거래처를 확보했지만 사업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인터넷의 확대로 제품에 대한 정보를 찾기가 쉬워졌고, 그동안 유통에 의지하던 제조회사들도 직접 거래에 나서면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졌다. 유통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이 대표는 2003년, 4월 (주)골드텔을 제조업으로 전환하고 지금의 광산업단지에 공장을 세웠다.
“시장의 흐름에 쫓기듯 제조업을 시작했지만, 자신은 있었습니다. 지난 세월 현장에서 배운 기술이 있었으니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사용하기 편한 제품을 만든다면 시장에서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접해본 제조업의 문턱은 너무나 높았다. 현장의 공사를 맡아 진행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조직문화와 업종간 대립으로 인한 정보공유의 어려움, 거기에 지역경제의 침체와 광산업의 중국시장 점유까지 호재보다는 악재가 더 많았다. 경영환경의 변화는 시작도 하기 전에 회사의 존립을 흔들어댔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군요.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사의 존립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필코 해내자는 생각으로 위기 극복을 위한 방법을 찾아나갔습니다.”
이 대표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그것을 회사에 접목하기로 하고, 기술개발을 결심했다. 지금 당장의 시장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시장에 사용되어질 제품을 개발하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 월급은 커녕 공과금도 겨우 내는 상황이었지만 이 대표와 직원들은 한마음이 되어 다시 시작했다.
기술개발, 기업의 내일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까지
이 대표는 2005년, 회사내 광기술연구소를 설립해 본격적인 기술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이것역시 쉽지 않았다.
“연구소만 설립하면 연구원들이 다 해줄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중소기업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연구원을 직원으로 채용할 수 없었고, 갓 졸업한 학생들을 연구원으로 채용했으니 기술개발은 커녕 현장에 대한 이해조차 부족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광관련 학과가 거의 없었으니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들의 광관련 지식의 한계는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 대표는 연구원들과 함께 현장을 이야기하고, 기술개발의 필요성을 공유하면서 기술개발에 나섰다. 기존의 공사현장에서 가장 불편했었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품목을 선택하여 제품화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지만, 광통신 부품은 대부분 국제표준화가 되어 있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는 것조차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표준을 바꿀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내용을 바꾼 것이지요. 외국 사람들의 사고로 보면 기능적으로 다른 A 와 B 라면 각각 A 이어야 하고, B 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사고로 본다면 A도 되고 B 도 되는 AB를 좋아하잖아요.”
이 대표는 가장 한국적인 개념을 제품에 넣을 수 있다면 국제표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바꿀 수 있을 것이고, 시장에서도 환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대표의 이런 생각은 2005년 ‘현장조립형광커넥터’로 결실을 맺게 된다.
현장조립형광커넥터는 FTTH(Fiber To The Home)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제품 중 하나이다. 기존의 광커넥터의 경우 연결을 위해서는 융착접속기를 이용해 작업해야 하고, 그 과정도 매우 까다로워 작업시간도 오래 걸렸다. 반면 현장조립형광커넥터는 융착접속기로 진행하는 에폭시 폴리싱공정을 단순화 시킨 제품이다. 상용화된 일반 커넥터 구성부품을 활용하는 것으로 재료비 절감은 물론, 광가입자망(FTTH)의 설치, 유지, 보수 기술자들이 현장에서 복잡한 공정을 거치지 않고 간단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해 서비스의 시간을 10분에서 2분으로 절감시켜 시간과 질을 크게 개선했다. 이렇게 개발된 제품은 2005년 산자부 기술표준원으로부터 국내최초 개발된 신기술(NT)로 인증 받았고, 2006년 산업자원부 신제품 인증(NEP-2005-051)을 받았다. 2012년에는 지식경제부 첨단기술제품확인(제 2012-10호)을 받음으로써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이 대표는 기술개발을 위해 열심히 달렸지만 고비는 언제나 마지막에 찾아왔다고 한다. 재품 개발을 완료하고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금형이 문제였다. 워낙 작은 제품이었고, 생산규모조자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라 선뜻 금형을 만들어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이 대표는 도면을 들고 금형을 할 곳을 찾아 나서서 겨우 금형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2년여의 개발 기간 중 가장 어려웠던 마지막 3개월은 금형공장과 사출공장을 밤낮으로 오가며 제품을 만들고 고치기를 반복하였고, 마침내 현장조립형광커넥터가 탄생했다.
2년을 공을 들여 만들어낸 제품이었는데, 이제는 시장상황이 문제였다. 2006년 18,000원을 하던 제품이 2008년 4,000원으로 떨어진 것이다. 제품 생산이 가능하더라도 가격경쟁력이 없으면 제품 생산조차 불가능하다고 판단, 생산에 들어가는 원가를 절감하는 방법을 다시 연구했다. 방법은 자동화 밖에 없었다. 핵심이 되는 공정이지만 수익이 낮은 부분을 자동화 해야했다. 현장조립형광커넥터 작업 공정 중 가장 많은 인원과 시간이 투여되고 제품의 품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공정은 광섬유의 절단과 삽입공정이다. 이는 단순 반복되는 작업으로 육안으로 쉽게 확인이 어려운 절단과정의 특성상 작업자들이 쉽게 피로를 느끼게 되고 광섬유절단면의 불량식별이 가능한 고가의 장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공정이라서 이 공정에 대한 자동화가 절실했다. 광섬유 절단면의 확인과 자동절단 및 광섬유 삽입까지 가능한 자동절단장치의 개발을 시작했지만, 이 자동화 기계는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 대표는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개발된 자동화 장치로 작업자 여섯명이 투입되던 공정이 한사람의 작업자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생산량도 3배이상 증가했다. 고품질화와 원가절감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제품역시 개발 당시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설치작업자들을 만나 제품을 사용토록 하고, 불편한 점을 설문지로 작성하게 했다, 이를 다시 데이터화 했고 반복적으로 개선된 제품으로 현장의 작업자를 찾아갔다. 지금도 꾸준히 현장을 찾아가 제품이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또 개선점에 대해 조사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품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또 현장에서 발견되는 개선되어야할 광통신부품에 대한 정보도 수집해 추가적인 개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대표는 광통신 분야에 드라마틱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새로운 제품의 개발에 앞서 기존 제품의 개선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2008년, 이 대표는 광통신 부품들의 가격하락을 보면서 해외 시장에 대한 대응도 준비했다. 우리나라 광통신 환경은 급속도로 성장을 해 집집마다 광케이블이 깔리고 있었지만 해외의 정보통신 환경은 우리나라처럼 빠르게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을 한 것이다. 2008년부터 해외판로개척을 위해 차근히 준비한 결과 해외시장도 조금씩 열려 지금은 매출의 30%를 해외시장이 차지하고 있다.
기술개발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광통신관련 부품중에 기존의 현장조립형광커넥터와 연관되어 적용되는 제품군으로 기술개발을 진행 중이며, 동시에 (주)골드텔이 입주해 있는 광산업단지내 광통신관련업체와 협력해서 완제품을 만들어 함께 판로를 개척하는 노력도 진행 중이다. 현장조립형광커넥터의 단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제품들과 같이 힘을 모으고, 그 안에서 (주)골드텔 제품의 특성을 알려나가는 것이다.
기능인으로 사는 오늘의 열정
“저는 기술인이라기보다는 기능인입니다. 현장에서 배우고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개발을 이루어 냈으며, 아직도 현장에 모든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는 현장의 공기를 사랑하고 현장의 소리를 사랑하는 기능인입니다”
이 대표는 현장에서 내가 가진 기술에 대한 자신감은 가졌지만 이것이 다른 사람 앞에서 큰 자부심이 된 것은 최근부터라고 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지위는 없었지만 내가 가진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고, 이렇게 인정을 받게 되어서 기쁘다는 이 대표는 ‘기능인이 인정받는 환경’은 언젠가는 꼭 온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때 기능인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의 열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도전하는 사명감과 용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열정입니다. 지금의 좌절보다는 시행착오를 경험삼아 돈이 아닌 일을 즐길 줄 알아야 진정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열정이 있어야 창조의 즐거움도, 노력의 고통도, 그리고 나만의 독창성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곧 열정이 기술이고, 그 기술이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 대표는 이러한 열정의 전파에도 열심이다. (주)골드텔의 창업과 기술개발 그리고 더 큰 도전의 과정이 모두 열정에서 비롯되었던 만큼 현장에서 꿈을 키워가는 이들이 또 학교에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이 그 열정을 함께 키우고 나눠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2005년부터 대학과 현장에서 기술 강의를 해오고 있었고, 올해부터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또, 광산업 광통신 미니클러스터의 임원으로 광산업 광통신분야의 기업들이 업종간 대립이 아닌 비전을 공유할 수 있도록 상생을 위한 노력을 함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