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타임즈=대표/편집장 우동완] 변호사 일을 한지 10여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시흥에서 변호사를 하면서 결혼도 했고 아이도 셋이나 낳았다. 본래 그의 고향은 경기도 이천이지만 아이들의 고향은 시흥시다. 이젠 누가 뭐라해도 시흥이 제2의 고향이되었다.
지난 18일, 시흥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젊은 변호사 서성민(38)을 만났다.
갑자기 그의 어린시절이 궁금했다.
“변호사다 보니 어릴적부터 공부를 잘했냐고 많이 묻는데 저는 그냥 놀기 좋아하고 가끔 싸우기도 하는 평범한 아이였어요. 고등학교때까지 미래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었던거 같아요.”
“그러다 집안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지면서 앞으로 혼자 뭘 하고 살아야 할지 그때 좀 깊게 생각했죠”
당시 그에겐 변호사라는 직업 보단 방송국 예능 PD가 더 끌렸다고 한다. 대학을 다니면서 알바와 공부로 이어지는 일상이 힘들었는데 유일한 낙이 무한도전이나 1박 2일 같은 TV예능프로그램을 보는 것이었다. 예능PD를 하면 즐겁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단다.
그래서 PD에 도전했다. 그런데 보란 듯이 떨어졌다. 생각해보면 유쾌한 성격의 그에게 예능PD도 잘 어울렸을 듯 해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PD는 떨어졌다. 운명적으로 그의 길이 아니었을 것이라 위로한다.
대학 3학년 즈음부턴 희망제작소와 서울 여성의 전화 등을 통한 사회활동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그쪽에 관심이 쏠렸다. 그때 느꼈던 것이 사회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넉넉지 않은 형편을 어떻게든 벗어나야겠다는 생각과 주변인들의 조언 등을 통해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변호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알바를 하면서 학원수강도 하고 로스쿨 입시준비를 열심히 했어요. 이후엔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했고요”
“이런 저런 알바를 참 많이 했는데 한때 와인바에서 일할때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안주를 남기고 가면 그걸 같이 일하던 알바생들과 나눠먹기도 했어요. 지금이라면...ㅎㅎㅎㅎ”
그렇게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지난 2013년 4월 변호사가 됐다. 이후 6개월 동안은 서초동에 있는 다른 변호사 사무실에서 수습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2014년 시흥에서 고용변호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시흥시란 곳을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와본적 없는 이름만 알던 생소한 동네였다고 한다.
그렇게 시흥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그가 일하는 곳에서 현재의 배우자도 만나게 된다.
2015년엔 자신의 이름으로 정왕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법원도 없는 시흥에서 왜 개업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의 답은 단순했다. “법원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는 곳엔 변호사가 필요해요” 복잡다단해지는 법률관계 속에 사람이 있는 곳엔 당연히 변호사도 필요한 법이었다. 편리를 위해 법원 앞이 좋긴 하겠지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적소에 사무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답이었다.
본격적으로 시흥살이를 하면서 동네변호사, 시흥 여성의 전화 등을 통해 주민들과의 친밀함을 쌓아나갔다. 의뢰인들에게 쓴소리도 곧 잘 했다. 거짓말로 포장하기 보단 의뢰인에게 정확히 알려주는 게 맞다는 판단에서 였다.
그런데 좀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어려운 소송에 이겨서 좋은 성과를 내도 “무슨 구멍가게에서 성과금 얘기를 하냐”며 실력 보단 규모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말들은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국선변호인으로 활동하면서 형사법에 대한 전문성을 키워나갔다. 형사사건 중 대부분이 전관이나 로펌을 찾아가는데 어려운 사람들의 경우 국선변호인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형사사건에 대한 경험도 키우면서 이들을 돕기 위해서 였다.
“국선변호인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배가고파서 절의 시주함을 털었던 절도범이나, 가족이 없어서 합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속적부심 단계에서 제가 직접 상대편을 만나 합의를 보기도 했고요”
대학생활을 알바로 어렵게 마친 그에게 없는 이들의 생계형 범죄는 안타까운 것이었다. 물론, 법이 만인에게 공평해야 하겠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은 현실이기에 그가 그렇게 열심히 뛴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어쨌든 그는 국선변호인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고, 형사전문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 지난 2018년 대만, 일본, 중국 등 여러 국가에 걸친 마약 유통 조직이 국내에서 300만명이 투약 가능한 마약을 유통하려다 적발된 역대 최대 규모의 사건이 발생했다.
서성민 변호사는 당시 외국인이었던 어린 피고인의 변호를 맡아 무죄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법원은 형사 사건상 거의 유례가 없는 보석으로 외국인의 석방을 허가했다.
서 변호사는 국내에 주소지가 없는 외국인의 보석을 신청하면서 도주의 염려 등을 위한 안전 장치로 자신의 집에서 함께 동거하겠다는 의견을 내었고 법원이 이를 허가한 것이다.
이후 서 변호사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 피고인과 자신의 집에서 약 2달간 불편한 동거를 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다.
“외국인 피고인과 같이 살아야 하는데 배우자와 상의도 없이 벌인 일이라 눈치 보느라 힘들었죠. 이후 그 피고인이 1심에서 무죄를 받았고 항소심에서 결과가 달라지긴 했지만, 당시로써는 국내 형사 사건 중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라 주목을 받았어요”
그렇게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정치하는 엄마들과 같은 단체 활동을 통해 어린이들을 위한 공익소송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올 2월 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정부에서 3기 신도시 계획을 발표했고 정국을 흔든 LH투기 사건의 광풍이 불어 닥쳤다.
“광명시흥이 포함된 3기 신도시 발표가 있던 날 오후 였어요. 익명의 제보가 왔는데 LH직원들이 발표전에 미리 투기를 했다는 내용이었죠”
서 변호사는 제보자가 알려준 필지의 소유자 정보와 LH직원들의 명단을 간단히 조회했다. 그런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나갔다. 임의로 설정한 다른 필지들도 조사했더니 LH직원들의 이름이 계속 튀어나왔다.
“이걸 보는 순간 그냥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어요. 그래서 민변과 참여연대에 알리고 자체적으로 좀 더 조사를 해보니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 하고 지난 3월 2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 같은 일들을 폭로했죠”
어떠한 계산이나 배경은 없었다. 단지 국가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이 앞섰다.
LH 임직원의 사전투기 의혹은 당국의 수사결과 의혹이 아닌 사실로 드러났다. 또 많은 공직자들이 이와 유사한 형태로 사전에 투기를 벌였다는 정황이 포착됐고 대통령이 나서서 강력한 수사와 처벌을 지시, 공직자, 정치인 등 사회 유력인사들이 심판대에 올랐다.
만연했던 공직자 투기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현재도 수사가 진행 중인 공직자 투기 사건의 문제제기를 통해 그간 지지부진했던 이해충돌방지법이나 공직자윤리법, 농지법 등 투기방지 대책이 담긴 법안들이 속속 통과되거나 개정됐다.
하지만 이 사건의 중심에 있던 서성민 변호사는 “평가는 이르고,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앞으로도 해나가야 할 일들이 많다는 얘기다.
공직자 투기 사건 이후 수많은 시민들의 응원이 그에게 쇄도했다. 그러나 거대한 권력과 고착화된 관행에 맞선 어려운 일이라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태풍이 지나 아직도 거센 바람이 부는 한가운데 서 있지만 돌아보면 그도 한 집안의 평범한 가장이다.
6살, 3살난 딸과 작년 11월에 태어나 시흥시 50만 대도시 진입에 일조한 막내 아들이 매일 그를 기다린다. 육아는 현실이다.
“아이 둘 일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힘들어요. 일상에 지치고 육아에 지치다 보니 뭔가 힐링 할 꺼리를 찾았는데 요샌 아이들을 재우고 나와서 하는 낚시에 흥미를 붙였어요. 낚시를 하다 보면 뭔가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배스 낚시를 하는데 아직 50센티 이상짜리는 잡아보지 못했어요.”
아이 키우기가 힘들다며 출산율 최저를 기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아들 딸을 셋이나 낳아 키운다는 어려움은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또 부당함에 눈감지 못하는 심성으로 모든지 자기일 처럼 해나가는 변호사로써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가 벅찬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폼만 잡는 변호사가 아니라 진실로 더 좋은 세상을 위해, 그리고 더 좋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낮은 곳의 목소리에 귀 기울리고 열정 하나로 뛰는 그를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힘찬 응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짝짝짝